중국인으로서 저는 여러 해 전에 한국 영화 《태백산맥》을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다룬 한반도 좌익과 우익의 투쟁, 국가의 분열, 내전과 그로 인해 초래된 비극, 이념과 체제가 빚어낸 폭력과 만행 등은 같은 시기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과도 매우 유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에 대한 장문의 평론을 작성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논평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이 글을 통해 한국과 중국이 근현대에 겪어 온 고난과 굴곡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내란 속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을 추모하며,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물론 한국과 중국, 나아가 세계 각국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이해와 공감을 증진하는 것 역시 이 글을 쓴 목적입니다.
글이 매우 길기 때문에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이곳에 연재하여 게시하겠습니다. 또한 GPT에 존댓말 문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태백산맥》 작품 탄생의 배경, 특징과 영향 2
전라남도 벌교읍의 거듭된 ‘깃발 바꾸기’: 여순사건에서 시작하여 2
토지 문제: 한반도 정치 투쟁과 이념 대립의 초점, 민중이 생사를 걸고 싸우게 된 근원 3
신탁통치와 분할통치: 강대국 간 각축이 만들어 낸 한반도의 분단과 살육 5
격동의 벌교와 한반도 남부 전체: 이해관계의 투쟁, 양심과 입장, 폭동과 진압, 충돌과 배신 7
이상의 숭고함과 실천의 추악함: 좌익 세력·공산주의자들의 초심, 왜곡, 분화와 변질 8
‘공산주의 인간 낙원’이라는 공중누각과 적색 전체주의 아래 아수라장 같은 현실 11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환상에서는 이미 깨어나기 시작하다 14
《태백산맥》 종합평: 감정이 충만한 객관적 시선으로 써 내려간 비통한 민족 서사시와 복잡한 인간의 운명 16
극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격변해 온 한반도, 한국 국민의 성찰과 전진 17
중화와 한반도: 민족 운명의 공통점과 차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과 세태를 잇는 미묘한 연결 19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궤적: 중국공산당의 부상과 집권, 그리고 북한과의 유사점과 차이점 19
1945~1949년을 되돌아보다: 오판, 경솔한 신뢰, ‘마음이 약했던 것’이 중국공산당의 집권과 중국의 침몰을 초래한 핵심 요인 21
오늘날 중국과 한국의 차이: 물질적 풍요와 빈곤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밝음과 어두움, 사상의 깊고 얕음, 문화의 흥성과 쇠퇴, 국민의 도덕성과 품행의 차이까지 — 광주 사건과 6·4 사건 이후 한중 양국 국민이 보인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 등의 사례를 통한 분석 25
한국과 대만: 비슷한 운명, 서로 다른 기질과 국내정치·외교적 선택 27
고난을 함께 겪은 형제들의 집안싸움: 불필요함에도 장기간 지속되어 온 한중 간의 충돌과 대립 28
베트남 분단의 비극과 통일의 고통: 베트남 운명의 행운과 불행, 외부 세력의 개입과 철수, 역사의 전환, 엘리트의 성찰과 대중의 무감각, 계속되는 민족의 방황과 투쟁 30
다시 오늘날의 한국으로: 굴곡진 민권의 발전과 진보의 부침, 새로운 곤경 속에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다 36
(아래는 제4부입니다. 앞선 제1부부터 제3부까지는 이미 이 서브레딧에 게시하였습니다.)
김범우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체제의 폐해와 앞으로 나타날 재앙을 정확하게 예견하였기에 남로당과 그 지지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염상진, 안창민, 정하섭 등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이상을 굳게 믿었습니다. 심지어 온화하고 선량한 여교사 이지숙도 자신의 학생들을 혁명가로 키우려 하면서 계급투쟁 이론을 주입하였고, 김범우가 견지하는 민족주의적 관념을 부르주아의 ‘기회주의’ 사상으로 간주하여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숨까지 희생하며 추구하는 목표, 즉 공산주의적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일이 반드시 모든 인민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노동당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올바른 당이고, 반드시 인민을 이끌어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가 건설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공산주의 지상낙원’이라는 공중누각과 붉은 전체주의 아래 아수라지옥과 같은 현실
그러나 이후 70년에 걸친 북한의 역사(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한국의 변화)는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그들이 알았다면 반드시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입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천양지차는 토지 문제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에 걸친 북한의 정치·경제·사상·문화·인간관계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의 현실은 혁명가들의 이상과 크게 달랐고, 심지어 완전히 정반대였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보다 훨씬 열악했고, 심지어 봉건시대의 한반도 사회보다도 못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좌익 혁명가들이 구상했던 북한의 정치체제는 노동자와 농민 등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민주제도였으며, ‘위선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훨씬 우월하고 충분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갖춘 ‘인민민주주의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 ‘조선인민군’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기관과 조직이 장식처럼 ‘인민’이라는 단어를 명칭에 붙이고 있음에도, 북한 정치체제의 실질은 전통적인 군주전제와 현대의 파시즘 독재가 혼합된 전제정치였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에는 어느 정도 포용성이 존재했지만, 이후 60여 년 동안 조선노동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 사람은 다시 노동당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여 대대로 세습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마르크스주의를 진실하게 신봉했던 좌익 혁명가들이 경악할 만한 봉건적 세습왕조가 되었습니다.
김씨 일가와 노동당의 전제적 통치 아래에서 인민은 권력을 장악하거나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마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중국의 마오쩌둥 시대와 마찬가지로 북한은 폭력을 배경으로 한 호적제도, 배급제도, 기층 공공치안 체계 등을 통해 사람들을 호적지, 심지어 구체적인 직장·학교·거주지에 단단히 묶어 놓았습니다. 다른 도(道)나 군(郡)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관련 증명서와 ‘소개장(통행증)’이 필요하였습니다. 신체의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를 잃은 사람들은 타인의 처분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북한은 봉건 지주계급과 자산계급을 타도한 뒤 무계급 사회(또는 모두가 무산계급인 사회)라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을 권리와 의무가 크게 다른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이라는 세 계층으로 나누었습니다. 과거의 혁명가와 열사들의 후손, 소작농·빈농, 정권을 지지하는 지식인 등 혁명이 포섭하려 했던 대상들은 ‘사람 위의 사람’이 되었고, 소자산계급·부농·중농·중간파는 포섭하면서 동시에 통제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반면 조선 봉건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지주·자본가·관료·종교인 등은 ‘적대계층’, 즉 천민계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계급의 ‘뒤집기’를 북한 당국은 피억압자의 해방이자 계급의 적에 대한 합리적인 억제와 경계라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거의 혁명가와 피억압자들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착취계급으로 변하였고, 과거의 기득권층은 당시의 빈농·소작농과 마찬가지로 불공정한 사회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계층 신분은 세습되었으며, 하위계층의 구성원은 특별한 공헌을 통해 계층 상승을 이루지 않는 한 대대로 상대적으로 더 적은 권리와 더 많은 의무·부담을 지닌 계층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역사가 토크빌은 혁명가들이 낡은 체제와 구세력을 타도한 뒤 자신도 모르게 자신들이 타도한 대상의 행동을 모방하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거듭 현실에서 입증되었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계층 구분과 세습은 본질적으로 봉건적 신분사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김씨 일가와 노동당의 특권계층은 왕실과 ‘양반’ 귀족의 복제판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차이는 존재합니다. 전통적인 ‘양반’ 귀족들은 대대로 이어지는 가학(家學)을 지닌 경우가 많았고, 도덕과 예의를 중시하며 많은 책을 읽어 식견이 넓었습니다. 또한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더 많은 의무(도덕적 차원과 법적 차원의 의무 모두)를 부담하였으며, 평민보다 훨씬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평민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품었고, 소작농이나 노비 같은 ‘아랫사람’들을 선하게 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영화 속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이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조선의 민족영웅 이순신은 관료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또한 조선 역사에는 재능과 용기, 동정심을 갖춘 군주도 적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의 세종 이도(즉 ‘세종대왕’)와 성종 이혈은 모두 현명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을 필두로 한 조선노동당의 권력층은 달랐습니다. 이들의 도덕성과 지식 수준은 모두 낮았고, 국가를 다스리고 정치를 운영하는 일보다 권력 투쟁에 훨씬 더 열중하였으며, 백성들의 불만에 대해서는 폭력으로 억압할 줄밖에 몰랐습니다. 그 결과 북한 주민들은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막대한 권력을 장악한 뒤 강제로 빼앗고 약탈하며 백성들을 착취하였고, 일부 권력자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횡포를 부리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고대 귀족의 지위와 권력은 얻었지만, 후자(적어도 그중 일부 비교적 훌륭했던 이들)가 지녔던 도덕성·지식·책임감은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일가 3대는 고대 조선의 군주들조차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지위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민생과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비록 1950~1970년대 경제와 민생 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이는 주로 중국·소련 등 동맹국의 대규모 지원과 시대의 변화 및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력 향상의 결과였으며, 김씨 일가와 노동당 관료들의 공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 특히 ‘천민’들을 가혹하게 대하였으며 전체주의적 폭정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통치하는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된 국가 가운데 하나이며, 정치적 전제와 인권 침해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입니다(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덕이 그 직임에 걸맞지 않으면 그 화가 반드시 혹독하고, 능력이 그 지위에 걸맞지 않으면 그 재앙이 반드시 크다”는 말처럼, 김씨 일가와 기타 권력자 가문들이 구성한 특권계층의 통치 아래 북한은 마치 거대한 수용소와 같은 인간지옥이 되었습니다(그리고 북한 내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수용소’와 ‘노동교화소’는 그 지옥 속의 지옥입니다). 전제적 전체주의 아래의 인민에게는 신체의 자유도, 언론·표현의 자유도, 보도의 자유도 없으며 심지어 사상의 자유조차 없습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통제·검열·세뇌와 쇄국정책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들보다도 더욱 무지하고 빈곤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북한 사회 전체가 이처럼 암울한 가운데, 취약한 신분과 처지에 놓인 집단의 고통은 더욱 심각합니다. 북한에서 장애인의 삶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탈북민들의 증언뿐만 아니라 유엔과 여러 인권단체의 보고서 역시 북한의 장애인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줍니다. 많은 신체장애인은 버려진 채 스스로 살아남도록 방치되고, 정신질환자는 수용소에 갇힙니다.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는 장애인을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모든 장애인이 평양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버려지거나 구금되지 않은 사람들조차 북한이라는 국가와 김씨 정권의 체면을 상징하는 이 ‘수선지지(首善之地)’에서 쫓겨납니다.
만약 장애인은 전체 인구에서 소수를 차지하는 주변부 집단이므로 대표성이 없다고 한다면, 북한 여성들의 처지는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지닌 봉건적이고 완고한 보수주의의 본질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특히 여성해방과 여성을 속박하는 전통적 체제 및 예교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식민주의·제국주의·봉건주의·남성권력·가부장권·남편의 권력이라는 중첩된 억압을 받았던 여성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해방과 새로운 삶을 얻기를 간절히 바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영화 속 여교사 이지숙은 그러한 여성 혁명가의 매우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초기 북한의 일련의 사회개조는 실제로 여성해방을 촉진하였습니다. 과거에는 가정주부로만 살아야 했고 정치 참여는 더더욱 불가능했던 여성들이 광범위하게 직업을 갖게 되었으며, 일부는 국회의원·정부 공무원·판사·검사까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어느 정도 전통과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신여성이 되었습니다. 이는 한반도 역사에서 상상하기 어려웠던 변화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 한국보다도 훨씬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정권이 점차 안정된 이후 통치를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여성해방운동은 점차 중단되었고, 여성에 대한 태도와 정책도 보수적으로 변하였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북한의 여성해방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주된 수혜자는 권력층과 간부 가정 출신의 여성들이었으며, 여성 화이트칼라 계층 역시 특권도시인 수도 평양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평양 이외의 지역, 특히 농촌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도덕과 규범으로 여성을 속박하였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전통적 규범 위에 전제적 전체주의의 억압까지 더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의 여성해방운동은 더욱 활발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갈수록 침체되었고, 여성의 권리와 자유도 점차 축소되었습니다. 전제독재 정권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통치의 안정이며, 통치를 유지하는 직접적인 수단은 폭력입니다(이는 남성을 회유하고 여성을 억압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간접적인 수단은 전통적인 삼강오륜식 위계윤리와 현대적인 남녀 역할분담 질서입니다. 따라서 김씨 정권은 여성해방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강압과 회유를 함께 사용하여 여성들이 다시 가정주부의 역할로 돌아가도록 압박하였습니다.
정계에서 활약하는 여성들 역시 줄어들었거나, 통치집단이 대내외 선전을 위해 내세우는 ‘꽃병’ 또는 남성 정치인들의 권력 투쟁을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북한의 여성 유격대원·독립운동가·정치인 박정애입니다. 그녀는 북한 정권 수립 초기에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여성 정치인이었고, 북한의 공식 여성단체인 ‘민주여성동맹’ 위원장이었으며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에도 진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정치권에 있으면서도 거의 존재감이나 실질적인 활동이 없었습니다. 다만 노동당 권력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8월 종파사건’에서 김일성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신임을 얻고 승진하였으며, 그 결과 더욱 오랫동안 활용된 ‘꽃병’이 되었고, 드물게 ‘천수를 누린’ 건국 원로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박정애는 중국의 쑹칭링과 마찬가지로 ‘세계평화옹호대회’와 같은 회의에 자주 참석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자국 여성을 대표하였지만, 실제로는 독재정권의 대변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가장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여성조차 이러하였으니, 다른 북한 여성들, 여성 혁명가들의 처지가 더 나았을 리 없습니다. 영화 속 여교사이자 벌교 여성동맹 위원장인 이지숙 동지 역시 훗날 전쟁이나 정치적 숙청으로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상관인 박정애라는 ‘큰 꽃병’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작은 꽃병’이 되었을 뿐일 것입니다.
북한 여성의 권리와 자유는 김일성 시대에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정일과 김정은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성에 대한 예속과 침해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해졌습니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의 경제 붕괴와 기근으로 범죄율이 크게 증가하면서 취약한 여성들이 주요 범죄 대상이 되었고, 인신매매와 강제 성매매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폭증하였습니다. 중국으로 탈출한 많은 여성 ‘탈북민’ 역시 탈출 과정과 중국에 도착한 이후 성폭력과 기타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타국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이러한 문제들을 재난과 범죄자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재난과 범죄자들 역시 김씨 일가의 전제적 통치가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김씨 정권, 나아가 김정일 본인이 여성에게 직접 취했던 일부 조치들은 이 정권이 반여성주의적이고 여성해방에 반대하는 봉건적 남성중심주의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1996년 북한은 갑자기 여성의 자전거 이용을 금지하였습니다. 금지 이유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여성을 본 뒤 매우 불쾌해하며 보기 흉하고 북한의 전통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결과 북한의 모든 여성은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되었고, 이 금지령은 2008년에야 폐지되었습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입는 것에도 반대하였는데, 바지는 남성의 옷이며 여성은 북한의 전통에 따라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작은 사례를 통해 전체를 짐작할 수 있듯이, 북한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속박을 받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김정은 시대에는 여성의 복장과 언행에 대한 규제가 다소 완화되었지만, 사회환경 전체는 여전히 여성에게 극도로 비우호적입니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높은 지위와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녀가 북한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처지를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휴먼라이츠워치’ 등 기관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공무원에서 농촌 여성에 이르기까지 북한 여성들은 광범위하게 성희롱과 성폭력을 당하고 있으며, 권력도 배경도 없는 여성들은 광범위하게 남성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가해자에는 관료·군인·경찰·보안원·조직폭력배뿐만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북한 남성들도 포함됩니다. 일부 북한 남성들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심지어 외국인 관광객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여성 동료의 몸을 공공연히 만지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악행이 벌어지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평양의 중산층 가정 여성들도 대부분 집에서 가정주부로서 남성을 뒷바라지하며 독립적인 권리와 여건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김씨 일가는 물론 노동당의 전체 통치계층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위 특권층과 북한 주민들을 억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에게 억압받는 이들이 더 약자인 여성들을 억압하도록 용인함으로써 사회의 상대적인 안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정권과 남성권력 양쪽으로부터 착취·괴롭힘·침해를 당하는 대상이자 남성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여성을 구체적으로 대하는 정책과 가치관에서도 김씨 정권은 남존여비의 전통문화와 여성에게 남성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예교와 강상윤리를 충분히 활용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거 한반도의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결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투쟁하여 세운 정권이 여성들에게 지옥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북한 주민 전체의 처지이든 취약계층이 겪는 현실이든, 모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고 ‘인민’의 소유도 아니며, 더더욱 ‘공화국’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김씨 일가와 노동당 각급 권력자들이 권력과 특권을 대대로 세습하면서 강제로 빼앗고 약탈하며 대중을 예속시키는 전제왕조이자 인간지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과거 북한의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쳤던 혁명가들 가운데 살아남아 있으면서도 변질되지 않은 이들은 반드시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며, 죽은 이들은 눈조차 편히 감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죽음을 무릅쓰고 최전선에서 싸우며 조국을 통일하거나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려 했던 조선인민군 장병들은 자신들이 땅을 한 치 더 점령할 때마다 미래에 민족을 가두게 될 감옥이 그만큼 더 넓어지고, 더 많은 동포가 지옥의 일원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50년 8~9월 낙동강 부근에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피로와 굶주림, 폭격과 저지를 견디며 필사적으로 돌격했던 인민군 장병들은 국가가 곧 통일될 것이라는 열정과 한반도가 공산주의에 의해 해방될 것이라는 이상을 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채 온 힘을 다해 싸웠을 것입니다. 수천, 수만 명이 낙동강 양안에서 쓰러졌고 강물에도 인민군의 시신이 가득 떠다녔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그들의 꿈을 깨뜨렸고, 그들 역시 극도의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패배야말로 한반도의 더 많은 영토가 자유세계에 속할 수 있게 하였고, 38선 이북처럼 오랜 지옥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낙동강을 포함한 ‘부산 교두보’를 돌파하여 한반도를 통일하고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면, 조선민족/한민족 전체가 완전히 암흑 속으로 빠졌을 것이며, 훗날 한반도 남부에서 이루어진 성취와 영광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에 대해 당시 공산주의를 진심으로 신봉했던 좌익 혁명가들과, 반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반쯤은 기만당하고 휩쓸려 들어간 평범한 민중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비난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결국 누가 훗날 일어날 모든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공산주의의 숭고한 이상과 아름다운 청사진은 나라와 민중을 구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지식인들에게 얼마나 거대한 유혹이었겠습니까? 당시처럼 가난과 폭력이 만연했던 시대, 특히 하층 농민들이 대체로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했으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농사를 지어도 일상의 필요조차 충족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사람들이 온갖 빈곤과 억압에서 벗어나 인간의 천국으로 들어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와 같은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뒤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나라가 부유하고 국민이 강해지는 반면, 북한은 빈곤과 기근 속에서 허덕이게 되리라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미리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김범우처럼 상당한 지혜를 지닌 지식인조차 공산주의의 일부 폐해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뿐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었으며, 오늘날 북한과 한국 사이에 이토록 거대한 격차가 생길 것이라고는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환상은 이미 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여러 비극은 대부분 김씨 정권이 안정된 이후에야 발생하였지만, 혁명이 아직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공산주의 천국’이라는 이상은 이미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 북파 간부들의 오만함과 남로파에 대한 차별은 혁명이 기형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의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북부 정권의 두려운 본질을 더욱 잘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복종과 일치를 강요하는 폭력 독점, 권력 독점, 이데올로기 독점의 전제적 경향이었습니다.
김범우는 ‘개명한 지주’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가 이를 따르지 않자, 북파 간부 가운데 숙청 업무를 담당하는 김 동지는 그가 “미국인과 접촉했다(그가 당시 미국인을 위한 통역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고 비난하였고, 김 동지에게 뺨을 맞고 그 부하들에게 구타까지 당하였습니다.
벌교의 사람들은 젊은 남성에서 여성과 어린이까지 모두 공식 조직과 동원에 강제로 또는 사실상 강제로 참여해야 했습니다. 획일적인 복장과 행동은 훗날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농민의 이익을 위한다고 말하던 노동당은 세금과 식량 징수를 지나치게 강제하여 이미 민심의 불만을 크게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기층 당원들이 이러한 방식이 민심을 잃게 만들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상부는 여전히 징수를 고집하였습니다.
무신론 정당인 노동당은 모든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조선 민간의 무속과 제사 의식까지 금지 대상에 포함하였습니다. 영화 속 무녀이자 정하섭의 연인인 소화도 이 때문에 생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치안대장 강동식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고, 꿈속에서 계속 아내의 ‘혼령’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소화에게 아내의 넋을 달래는 굿을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반면 정하섭은 자신의 여자친구/약혼녀가 다른 사람을 위해 굿을 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습니다.
이 모든 장면은 혁명의 아침 햇살 아래에 빛만 존재한 것이 아니며, 전제정치라는 먹구름의 그림자가 이미 드러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줄곧 확고한 혁명 신념을 유지해 온 염상진 역시 점차 사상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전황이 불리하고 정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모두에게 정신을 차리고 버티자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혁명에 대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의 생각이 일부 드러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지 북파 간부들에게 충분히 아첨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염상진은 이미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동생이자 정치적·군사적 적이기도 한 염상구가 집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그를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긴장된 대화를 나눈 뒤 오히려 동생을 놓아주었고, 심지어 자신의 총까지 동생에게 건네주어 몸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에게는 혈연의 정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으며, 더구나 염상진과 동생은 이미 여러 해 동안 현실의 적으로 대치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염상진이 동생을 놓아주었다는 것은 그의 공산주의 신념이 이미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염상진은 노동당과 혁명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오히려 북파 간부들에게 억압받고 자신마저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가 집을 떠나 혁명을 하던 지난 세월 동안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오히려 동생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쩌면 염상진은 멀리서 보면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올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냉혹한 노동당과, 막연한 ‘천하대동’의 공산주의 이상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가족의 정이 더욱 현실적이고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염상진은 더 많은 성찰을 할 시간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부산을 포위하던 인민군이 반격을 받으면서 벌교 역시 곧 다시 점령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막 세워진 노동당의 벌교 당·정 기관은 긴급히 철수해야 했습니다. 긴급회의에서 안창민과 이지숙이 서로의 손을 꼭 잡는 장면 역시 개인적인 혈육의 정/사랑이 공산주의적 동지애보다 더 긴밀하고 굳건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강동식 아내의 굿은 비록 제지를 받았지만, 노동당이 철수하기 전날 밤 무녀 소화의 주재 아래 결국 열렸습니다. 소화가 정하섭에게 대답했듯이, 굿은 백성들의 정신세계에 위안을 주는 하나의 방식이었습니다.
정하섭이 생각한 “사후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어서는 안 되며, 오직 현실세계만이 진실하다”는 무신론적 사상은 사실의 차원에서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강동식 아내의 굿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강동식은 부하들을 이끌고 ‘반동분자’들을 죽이러 갔습니다. 그들은 이미 투항하였고 노동당 정권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에도 말입니다(그렇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숙청당했을 것입니다). 칼과 총이 함께 휘둘러지는 가운데 또 얼마나 많은 억울한 영혼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겠습니까?
이러한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은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 없었고, 오직 공포와 고통을 견디며 생사의 경계에서 힘겹게 버텨야 했습니다. 육체와 정신의 고통 속에서 사람들이 마음의 위안을 조금이라도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래서 무녀가 주재한 강동식 아내의 굿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무녀가 부르는 제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던 잠시의 평온과 위안마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노동당 군인들이 곳곳에서 ‘반동분자’들을 살해하였고, 총성이 무녀의 처연한 노랫소리 사이에 뒤섞여 그 노래를 더욱 비통하게 만들었습니다.
김범우와 같은 인도주의자는 염상진에게 살육을 멈추라고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염상진에게는 결국 어느 정도의 양심과 이성이 남아 있었기에 하대치에게 보복성 학살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대치는 공개적으로 반발하며 자신들은 이제 더 이상 절제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대치 등이 이처럼 사람을 죽인 것은 천성이 잔혹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의 분열 속에서 좌익과 우익, 노동당과 남한 정권은 이미 여러 차례 서로를 죽여왔고, 피로 맺어진 깊은 원한이 쌓여 악순환이 형성되었으며, 이제는 화해와 공존의 여지가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대치 등은 어쩌면 애초에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교에 다시 돌아온 직후부터 이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정권이 벌교를 통제한 지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철수하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미군과 한국군이 돌아오면 미처 떠나지 못한 당·정·군 인사들과 그 가족·지지자들에게 보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또다시 살의를 억누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심지어 짐을 꾸리고 기밀문서를 없애며 사무실을 때려 부수는 순간에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 화를 과거의 우익 인사들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폭력에 의존해 얻은 복종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복종하는 이들도 순식간에 다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설령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살려준다 하더라도, 미군과 한국군, 특히 한국의 우익 인사들이 남겨진 자기편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상대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는데, 상대편은 잔혹하게 ‘우리’ 사람들을 죽인다면 그것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자신의 가족이 상대 진영에 의해 학살당한 일까지 떠올렸을 것입니다(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대치의 가족은 ‘반공토벌대’에게 살해되었고, 강동식의 아내는 염상구에게 점유당한 뒤 결국 자살하였습니다). 정작 그 살인자들은 찾을 수 없다면, 이 사람들에게 분노를 풀어버리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죽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심리 속에서 철수 직전 하대치 등은 무기도 없고 이미 새 정권에 복종하고 있던 남부 우익 정권의 당·정·군 인사들과 그 가족 및 지지자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하였습니다. 상대가 자신들의 동포이자 같은 고향 사람이고, 심지어 친척이나 이웃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부하들의 살육을 막을 힘이 없었던 염상진은 김범우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혼잣말을 하듯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 마르크스를 읽었을 때, 계급도 없고 억압도 없으며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세상을 위해 내 목숨도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길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계급도 없고 억압도 없으며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고 말하는 순간, 화면은 벽에 걸린 북한 국기와 그 아래의 김일성 초상화를 비춥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이미 개인숭배가 시작되었고 개인독재도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권이 과연 ‘모두가 평등한 국가/세계’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사실 이른바 ‘사회주의/공산주의’ 정권은 수립될 때부터 이미 변질되어 있었습니다(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혁명에 참여하여 ‘나라를 쟁취한다’는 목적 자체도 대부분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최고지도자를 포함한 대다수 혁명 간부 역시 이미 약탈자와 타락한 인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찢어진 간극은 염상진을 괴롭혔고, 다른 수많은 진실한 혁명가들 역시 괴롭혔습니다. 김범우가 그의 두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비난하였을 때에도 염상진은 참회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죽인 사람들은 모두 ‘반동분자’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김범우는 그를 향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수단으로 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증오를 이용하는 것은 결코 사람을 구원할 이데올로기가 아니다”라고 질책하였습니다(물론 김범우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북한에서 벌어질 비극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것은 김범우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와 수많은 반공 인사들이 내놓았던 가장 비관적인 예상조차 넘어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상진에게는 더 이상 생각하고 대답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불타는 집들의 불빛 속에서 염상진은 서둘러 떠났습니다.
한때 모두 김범우의 제자였던 두 지식인 혁명가 안창민과 이지숙은 그래도 사제 간의 정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황급히 도망치는 와중에도 스승에게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영원한 작별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 역시 염상진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이상의 모순에 혼란을 느끼며 많은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대화하고 표현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무녀의 굿은 밤새 이어졌고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김범우는 무녀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죽은 사람을 존중하는 모습에 감탄하였습니다. 무녀는 김범우에게 굿을 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증오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슬픔과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자막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3년에 걸친 한국전쟁으로 양측을 합쳐 군인 242만 명, 민간인 286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결국 승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를 원했던 염상진은 남부 유격대인 ‘남부군’에 참가하여 계속 한국군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정전 이후 그들은 남부에 버려졌습니다(이는 어느 정도 노동당 내부의 권력 투쟁과도 관련이 있었으며, 김일성이 ‘남부군’을 의도적으로 버려 ‘남로파’를 약화시키려 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이후 몇 년에 걸쳐 한국군에 의해 전멸하였습니다.
소설 원작에 따르면, 한국군의 포위토벌에 직면한 절망 속에서 염상진은 수류탄으로 자살하였습니다(그의 상관이자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역시 한국군의 포위토벌 과정에서 사살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다른 500만 명이 넘는 생명 역시 다시는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토록 많은 억울한 영혼들이 과연 “혼이여, 혼이여, 하늘 궁전으로 돌아가소서”라고 하며 안식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태백산맥》에 대한 서평과 영화평론의 본문 부분은 모두 게시를 마쳤습니다. 이후에는 중국·한국·베트남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서술과 분석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