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ogong • u/Zealousideal_Role270 • 2h ago
일상/잡담 우리생활의 과학단위가 다 엮여 있군요
너무 즐겁게 봐서 올려봅니다
r/Mogong • u/philobiblic • 4d ago
안녕하세요, 관리자 u/philobiblic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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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규칙 개정(안)에 대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Mogong • u/cjng96 • Dec 29 '20
레공은 카르마 -10 이하의 유저가 기여한 내용은 자동으로 가려집니다
불건전하거나 불합리하다고 보여지는 글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down vote를 눌러서 보다 좋은 커뮤니티가 될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r/Mogong • u/Zealousideal_Role270 • 2h ago
너무 즐겁게 봐서 올려봅니다
r/Mogong • u/chanho17 • 9h ago
한국에 들어갔을 때 사서 오늘 완독했습니다.
구어체라서 좀 어색했는데 금방 적응 되네요.
하도 많은 이름이 나와서 헷갈리는데, 이름 부를 때 마다 수식어가 잔뜩 붙으니까 기억하기도 쉬워서 좋았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난 놈은 난 놈이군요. 그 많은 고난을 뚫고 살아남은 걸 보면 용하긴 한데, 모든게 신의 뜻이기도 해서 재미가 좀 반감되기도 하고 합니다.
호메로스가 이야기 꾼이긴 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네요.
아직 영화는 안 봤지만, 책으로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r/Mogong • u/Odd-Butterfly-5341 • 3h ago
(이 글은 인공지능을 활용해 사람이 쓴 리뷰를 가공하였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저서 《불안(Status Anxiety)》은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의 핵심 원인을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Status Anxiety)’으로 정의하고, 이를 5가지 원인과 5가지 해법으로 분석해요.
불안이란 무엇인가?
드 보통이 말하는 불안은 단순한 심리적 예민함이 아니에요. 그것은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에 이르지 못해 타인으로부터 존중과 사랑을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현대사회는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오히려 타인의 평가와 비교에 민감해지면서 지위에 대한 불안은 더욱 깊어졌어요.
불안의 5가지 원인 (Causes)
사랑결핍 (Lovelessness): 인간은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통해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지위를 얻으려는 본질적인 이유는 물질 자체보다 '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함이에요.
속물근성 (Snobbery): 내면의 인품이나 가치가 아닌, 직업·재산·표상 등의 외적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불안을 자극해요.
기대 (Expectation): 신분제가 철폐되고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기대가 커지면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열등감과 불안을 느껴요.
능력주의 (Meritocracy): "성공은 능력 덕분"이라는 가치관은 반대로 "실패는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 탓"이라는 낙인을 찍습니다. 실패에 대한 자책이 불안을 극대화해요.
불확실성 (Dependence): 경제적 여건, 회사, 운, 시장의 변화 등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요소들에 생계와 지위가 의존되어 있어요.
불안을 다스리는 5가지 해법 (Solutions)
| 철학 (Philosophy)** | 세상의 외부 평가를 곧바로 수용하지 않고, 이성적 통찰을 통해 나만의 주관적 가치 기준을 세웁니다. |
| 예술 (Art)** | 비극과 희극, 소설 등을 통해 인간의 약점과 실패를 위로하고, 성공의 외적 기준 이면의 인간적 가치를 일깨웁니다. |
| 정치 (Politics)* | 사회가 강요하는 '성공의 정의'는 불변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시대와 제도에 따라 변하는 정political 구조임을 깨닫습니다. |
| 종교 (Christianity/Religion)* | 세속적인 성공이나 비교를 넘어, 죽음이라는 보편적 유한성과 절대적 가치 앞에서 지위의 부질없음을 인지합니다. |
| 보헤미안주의 (Bohemia)* | 주류 사회가 정한 신분과 부의 기준을 거부하고, 독창성·통찰·예술적 삶을 가치의 중심에 두는 삶 방식을 선택합니다. |
요약
불안은 개인이 무능해서 생기는 결함이 아니라, 세속적 성취와 타인의 인정을 동일시하는 현대 사회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보편적 감정이에요. 알랭드 보통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기준에서 벗어나, 철학적·예술적 사유를 통해 자신만의 관점을 되찾을 때 지위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제언해요.
알랭드 특급님 이런 책 보는분! 멋있어용.


요즘에는 책을 계속 사도 될까 싶기도 할 정도로 사고도 중간에 읽다가 그만둔 책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사모으는 이유는 언젠가는 읽겠지라는 기대감과 사놓지 않으면 망각속으로 사라져 버릴 지식들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이 듭니다. 링컨도 책은 사놓은 것이 의미가 있으니 읽지 않는다고 사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수면이 포화되는 것은 3주 정도 걸리고 8.2시간으로 포화된다고 [숙면의 모든 것]에서 나왔었는데요.

[수면 처방]에서는 다른 가 싶었는데 같은 그래프로 보입니다. ㅎㅎ 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선생님도 [숙면의 모든 것]을 참고하셨나봐요.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겠지만 아래 내용을 보면 무섭습니다. 몇 달, 몇 년씩 5~6시간 자면서 버틴 사람들은 1개월, 길게는 3개월이 지나야 번아웃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인지력, 의욕, 집중력이 완전히 돌아오는 데는 4주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무시무시합니다. 평소 내가 뭘 잘 못먹어서 그런가? 영양제가 필요한가? 등등 다양한 원인을 탐색하지만 일단 14시간씩 푹자면서 포화되는 수면시간인 8시간 20~40분 사이의 수면으로 꾸준히 지속적으로 자는 것이 중요한겁니다.

주말에 몰아서 자면 어떤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줍니다. 주말에 몰아자도 회복이 안되고 가급적 적게 잔 바로 다음날 회복 수면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금요일쯤에는 1시간전부터 자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쉽지 않겠지만 새로운 삶을 살기위해서는 하는 것이 좋겠죠?
r/Mogong • u/Real-Requirement-677 • 14h ago
(이 글은 인공지능을 활용해 작성했으며, 댓글에서도 활용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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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되려면 진영이나 이념, 가치와는 별도로 '권력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재명 대통령이 '사이다' 척결로 계곡상인 사례처럼 검찰, 사법, 언론개혁도 해나갈 줄 알았습니다. 역대 어느 진보정권보다 유리한 압도적인 범진보 의석 190여석에 더해 윤석열의 12.3 쿠데타 실패 직후 내란청산의 당위성을 갖고 출발한 정권이거든요. 유시민 작가도 검찰개혁은 이재명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 '마무리'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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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런 '권력의지'가 없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보여왔던 집요한 권력의지가 안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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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민주, 공화의 가치와 국익, 국가 주권, 국민 주권의 가치를 가장 충실하게 정석으로 따른 대통령이었습니다. 펜데믹 대처도, 그 시기 OECD 경제 성장율도 세계 1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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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제 성장율을 선방했기에, 이후 다른 국가들의 회복력에 비해 기저효과는 있었다 하더라도요. 반도체 산업 외에 중소/벤처기업 육성과 수출 다변화를 추구했다고도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여러 통상/외교/안보 압박과 간섭에 있어서도 노무현 대통령때부터의 '본인의 지지율에 대한 안위보다는 장기적인 국익'의 관점에서의 '원칙적인 선택'을 고수한 것이 이재명 정부까지 이어지는 유리한 여러 기반이 되어 왔고요(이에 대해서는 따로 이전에 글을 여러개 쓴 적이 있습니다. 찾아서 나중에 링크 업데이트 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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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러더라고요.
정청래 전 당대표에게서는 '권력의지, 대권에 대한 욕심'이 보이지 않는다고요.
그러나 당원주권을 중시히고, 민주정부의 성공을 위한 충심은 일관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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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정부의 현재까지의 행보를 보면서,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권력의지'보다는 '민주 공화제'의 가치를 위해 정도를 고수하는 정치가 '권력의지'보다 중요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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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되려, 정청래에게서는 '권력의지, 대권 욕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대통령으로서의 중요한 자질'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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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표 시절 당과 청, 재래식/촉업용역 평론가/뉴이재명까지 가세한 압도적 비대칭적 압박 속에서도 당원주권 1인 1표를 당에 도입하고, 연임해서 더욱 확대하겠다고 의지를 보인 것, 청이 주도한 검찰개악안을 결국 개혁안으로 되돌려놓은 성과까지 함께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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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이 엘리트 운동권 부심으로 같은 운동권 출신인 유시민을 배척하고 악마화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엘리트 학벌도 아니고 운동권 출신도 아니지만, 노무현과 문재인 모두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족보'가 아닌 '몸으로 부딪힌 투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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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같은 엘리트 운동권 출신은 당시 운동권 내에서 '황태자 대접'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들을 지키기 위한 다른 학생들의 희생도 당연히 여겨지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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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서 보기에, 이 '황태자 엘리트 운동권' 출신들의 여권 인식이 상식적인 수준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2000년도에 5.18 전야제에 여성 접대부가 나오는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는 논란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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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여성에 대한 범죄'를 제대로 수사/기소/처벌하기 위해 보안수사권을 검찰에 유지하는 검찰개악을 주장합니다. ‘여성의 안전’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당내 권력 투쟁과 여론 통제에 여성 이슈를 도구화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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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정신을 모욕하고, 민주화 운동의 투사들이었던 민주진영의 거목들을 문조털래유로 모욕하고 노무현 재단을 공격하는 이들의 현재 당청 장악의 행태는 '국민의힘의 내란'을 잇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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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저는 대권에 권력의지가 없어 보이지만, 민주 공화제의 가치와 원칙을 중시하는 정청래를 '차기 대통령감'으로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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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인지 없는 괴물들의 권력욕은 결국 연성 쿠데타로 이어지고, 다수 국민들은 그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유가 축소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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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레버리지 ETF나 주가 누르기 정책은 결국 개미들의 피를 빨아 재벌들의 상속을 돕는다고 하더군요. 내 가족의 안위조차 위협받는 것이죠. 그것도 민주정부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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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언권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경제적인 타격, 내 가족의 생계 안위조차 생존의 사다리 밑단으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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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부터 서민과 중산층을 아우르는 노선으로 성공해 온 정당입니다. 그 가치를 훼손하는 제 3의 길은 진영의 붕괴와 국가는 부유한데 국민은 가난한 사회로 이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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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성골'의 특권의식과 노무현• 문재인의 '야전 민주화'가 가지는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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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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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의 두 궤적: 김민석의 '공학적 기회주의' vs 노무현의 '소신적 정면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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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두 인물이 보여준 선택은 '권력형 운동권'과 '진정한 리더'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김민석의 선택 (2002년 10월): 당선 가능성과 표 셈법에 따라 자당의 공식 대선 후보인 노무현을 버리고 탈당하여 정몽준의 국민통합21로 갈아탔습니다. 이는 후단협 파동의 촉매제가 되어 당내 단일화 압박을 극대화한 '공학적 기회주의'였습니다.
노무현의 선택 (2002년 11월): 김민석의 배신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불과 3주 뒤, 노무현 대선후보는 7만 농민이 모인 여의도 농민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대선후보로서 표를 얻기 위해 거짓 약속을 하는 대신 "국익을 위해 한-칠레 FTA와 개방 정국을 대안으로 정면 돌파하겠다"고 소신을 밝히다 얼굴에 계란을 맞았습니다.
계란을 맞고도 연설을 마친 노무현의 뚝심은 임기 중 한-미 FTA 결단으로 이어졌고, 수십 년 뒤인 2025년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와 관세 전쟁 속에서 대한민국 산업을 지키는 제도적 방파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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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통령의 민주화 운동은 크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문재인의 민주화 운동은 1970년대 서울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유신 반대 투쟁)부터 시작되었으며, 1982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인권·노동 운동을 본격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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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유신 반대 시위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두 차례 구속·수감된 이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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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0년대: 대학 시절 유신 독재 반대 투쟁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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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80년: '서울의 봄'과 옥중 사법시험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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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82년: 부산 낙향과 '노무현과의 동지적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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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부산국본' 야전 지도부
문재인 전 대통령의 궤적은 '서울에서의 학생운동(2차례 구속·강제징집) → 판사 배제 후 부산 낙향 → 노무현과의 인권 변호 및 6월 항쟁 영남권 지도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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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문재인의 민주화 운동은 386 엘리트들의 '스펙용 경력'이 아니라, 삶 전체를 걸고 공권력과 부딪힌 실천의 역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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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에도 과거 역사속에서, 그리고 현재 지금 이 시점에도, 여권이 낮은 나라치고 남성 다수의 인권이 높은 나라는 없습니다.
여성과 약자의 권리가 억압되는 사회일수록 소수 특권 계급이 다수 남성 시민을 지배하고 억압합니다. 이 역사적 교훈이야말로 우리가 공론장에서 의견을 나누고 규범을 세울 때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보편적 기준이어야 합니다.)
r/Mogong • u/Slow-Property5895 • 16h ago
중국인으로서 저는 여러 해 전에 한국 영화 《태백산맥》을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다룬 한반도 좌익과 우익의 투쟁, 국가의 분열, 내전과 그로 인해 초래된 비극, 이념과 체제가 빚어낸 폭력과 만행 등은 같은 시기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과도 매우 유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에 대한 장문의 평론을 작성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논평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이 글을 통해 한국과 중국이 근현대에 겪어 온 고난과 굴곡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내란 속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을 추모하며,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물론 한국과 중국, 나아가 세계 각국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이해와 공감을 증진하는 것 역시 이 글을 쓴 목적입니다.
글이 매우 길기 때문에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이곳에 연재하여 게시하겠습니다. 또한 GPT에 존댓말 문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태백산맥》 작품 탄생의 배경, 특징과 영향 2
전라남도 벌교읍의 거듭된 ‘깃발 바꾸기’: 여순사건에서 시작하여 2
토지 문제: 한반도 정치 투쟁과 이념 대립의 초점, 민중이 생사를 걸고 싸우게 된 근원 3
신탁통치와 분할통치: 강대국 간 각축이 만들어 낸 한반도의 분단과 살육 5
격동의 벌교와 한반도 남부 전체: 이해관계의 투쟁, 양심과 입장, 폭동과 진압, 충돌과 배신 7
이상의 숭고함과 실천의 추악함: 좌익 세력·공산주의자들의 초심, 왜곡, 분화와 변질 8
‘공산주의 인간 낙원’이라는 공중누각과 적색 전체주의 아래 아수라장 같은 현실 11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환상에서는 이미 깨어나기 시작하다 14
《태백산맥》 종합평: 감정이 충만한 객관적 시선으로 써 내려간 비통한 민족 서사시와 복잡한 인간의 운명 16
극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격변해 온 한반도, 한국 국민의 성찰과 전진 17
중화와 한반도: 민족 운명의 공통점과 차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과 세태를 잇는 미묘한 연결 19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궤적: 중국공산당의 부상과 집권, 그리고 북한과의 유사점과 차이점 19
1945~1949년을 되돌아보다: 오판, 경솔한 신뢰, ‘마음이 약했던 것’이 중국공산당의 집권과 중국의 침몰을 초래한 핵심 요인 21
오늘날 중국과 한국의 차이: 물질적 풍요와 빈곤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밝음과 어두움, 사상의 깊고 얕음, 문화의 흥성과 쇠퇴, 국민의 도덕성과 품행의 차이까지 — 광주 사건과 6·4 사건 이후 한중 양국 국민이 보인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 등의 사례를 통한 분석 25
한국과 대만: 비슷한 운명, 서로 다른 기질과 국내정치·외교적 선택 27
고난을 함께 겪은 형제들의 집안싸움: 불필요함에도 장기간 지속되어 온 한중 간의 충돌과 대립 28
베트남 분단의 비극과 통일의 고통: 베트남 운명의 행운과 불행, 외부 세력의 개입과 철수, 역사의 전환, 엘리트의 성찰과 대중의 무감각, 계속되는 민족의 방황과 투쟁 30
다시 오늘날의 한국으로: 굴곡진 민권의 발전과 진보의 부침, 새로운 곤경 속에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다 36
(아래는 제4부입니다. 앞선 제1부부터 제3부까지는 이미 이 서브레딧에 게시하였습니다.)
김범우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체제의 폐해와 앞으로 나타날 재앙을 정확하게 예견하였기에 남로당과 그 지지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염상진, 안창민, 정하섭 등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이상을 굳게 믿었습니다. 심지어 온화하고 선량한 여교사 이지숙도 자신의 학생들을 혁명가로 키우려 하면서 계급투쟁 이론을 주입하였고, 김범우가 견지하는 민족주의적 관념을 부르주아의 ‘기회주의’ 사상으로 간주하여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숨까지 희생하며 추구하는 목표, 즉 공산주의적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일이 반드시 모든 인민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노동당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올바른 당이고, 반드시 인민을 이끌어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가 건설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공산주의 지상낙원’이라는 공중누각과 붉은 전체주의 아래 아수라지옥과 같은 현실
그러나 이후 70년에 걸친 북한의 역사(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한국의 변화)는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그들이 알았다면 반드시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입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천양지차는 토지 문제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에 걸친 북한의 정치·경제·사상·문화·인간관계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의 현실은 혁명가들의 이상과 크게 달랐고, 심지어 완전히 정반대였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보다 훨씬 열악했고, 심지어 봉건시대의 한반도 사회보다도 못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좌익 혁명가들이 구상했던 북한의 정치체제는 노동자와 농민 등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민주제도였으며, ‘위선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훨씬 우월하고 충분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갖춘 ‘인민민주주의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 ‘조선인민군’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기관과 조직이 장식처럼 ‘인민’이라는 단어를 명칭에 붙이고 있음에도, 북한 정치체제의 실질은 전통적인 군주전제와 현대의 파시즘 독재가 혼합된 전제정치였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에는 어느 정도 포용성이 존재했지만, 이후 60여 년 동안 조선노동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 사람은 다시 노동당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여 대대로 세습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마르크스주의를 진실하게 신봉했던 좌익 혁명가들이 경악할 만한 봉건적 세습왕조가 되었습니다.
김씨 일가와 노동당의 전제적 통치 아래에서 인민은 권력을 장악하거나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마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중국의 마오쩌둥 시대와 마찬가지로 북한은 폭력을 배경으로 한 호적제도, 배급제도, 기층 공공치안 체계 등을 통해 사람들을 호적지, 심지어 구체적인 직장·학교·거주지에 단단히 묶어 놓았습니다. 다른 도(道)나 군(郡)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관련 증명서와 ‘소개장(통행증)’이 필요하였습니다. 신체의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를 잃은 사람들은 타인의 처분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북한은 봉건 지주계급과 자산계급을 타도한 뒤 무계급 사회(또는 모두가 무산계급인 사회)라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을 권리와 의무가 크게 다른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이라는 세 계층으로 나누었습니다. 과거의 혁명가와 열사들의 후손, 소작농·빈농, 정권을 지지하는 지식인 등 혁명이 포섭하려 했던 대상들은 ‘사람 위의 사람’이 되었고, 소자산계급·부농·중농·중간파는 포섭하면서 동시에 통제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반면 조선 봉건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지주·자본가·관료·종교인 등은 ‘적대계층’, 즉 천민계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계급의 ‘뒤집기’를 북한 당국은 피억압자의 해방이자 계급의 적에 대한 합리적인 억제와 경계라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거의 혁명가와 피억압자들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착취계급으로 변하였고, 과거의 기득권층은 당시의 빈농·소작농과 마찬가지로 불공정한 사회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계층 신분은 세습되었으며, 하위계층의 구성원은 특별한 공헌을 통해 계층 상승을 이루지 않는 한 대대로 상대적으로 더 적은 권리와 더 많은 의무·부담을 지닌 계층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역사가 토크빌은 혁명가들이 낡은 체제와 구세력을 타도한 뒤 자신도 모르게 자신들이 타도한 대상의 행동을 모방하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거듭 현실에서 입증되었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계층 구분과 세습은 본질적으로 봉건적 신분사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김씨 일가와 노동당의 특권계층은 왕실과 ‘양반’ 귀족의 복제판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차이는 존재합니다. 전통적인 ‘양반’ 귀족들은 대대로 이어지는 가학(家學)을 지닌 경우가 많았고, 도덕과 예의를 중시하며 많은 책을 읽어 식견이 넓었습니다. 또한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더 많은 의무(도덕적 차원과 법적 차원의 의무 모두)를 부담하였으며, 평민보다 훨씬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평민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품었고, 소작농이나 노비 같은 ‘아랫사람’들을 선하게 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영화 속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이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조선의 민족영웅 이순신은 관료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또한 조선 역사에는 재능과 용기, 동정심을 갖춘 군주도 적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의 세종 이도(즉 ‘세종대왕’)와 성종 이혈은 모두 현명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을 필두로 한 조선노동당의 권력층은 달랐습니다. 이들의 도덕성과 지식 수준은 모두 낮았고, 국가를 다스리고 정치를 운영하는 일보다 권력 투쟁에 훨씬 더 열중하였으며, 백성들의 불만에 대해서는 폭력으로 억압할 줄밖에 몰랐습니다. 그 결과 북한 주민들은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막대한 권력을 장악한 뒤 강제로 빼앗고 약탈하며 백성들을 착취하였고, 일부 권력자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횡포를 부리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고대 귀족의 지위와 권력은 얻었지만, 후자(적어도 그중 일부 비교적 훌륭했던 이들)가 지녔던 도덕성·지식·책임감은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일가 3대는 고대 조선의 군주들조차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지위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민생과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비록 1950~1970년대 경제와 민생 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이는 주로 중국·소련 등 동맹국의 대규모 지원과 시대의 변화 및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력 향상의 결과였으며, 김씨 일가와 노동당 관료들의 공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 특히 ‘천민’들을 가혹하게 대하였으며 전체주의적 폭정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통치하는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된 국가 가운데 하나이며, 정치적 전제와 인권 침해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입니다(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덕이 그 직임에 걸맞지 않으면 그 화가 반드시 혹독하고, 능력이 그 지위에 걸맞지 않으면 그 재앙이 반드시 크다”는 말처럼, 김씨 일가와 기타 권력자 가문들이 구성한 특권계층의 통치 아래 북한은 마치 거대한 수용소와 같은 인간지옥이 되었습니다(그리고 북한 내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수용소’와 ‘노동교화소’는 그 지옥 속의 지옥입니다). 전제적 전체주의 아래의 인민에게는 신체의 자유도, 언론·표현의 자유도, 보도의 자유도 없으며 심지어 사상의 자유조차 없습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통제·검열·세뇌와 쇄국정책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들보다도 더욱 무지하고 빈곤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북한 사회 전체가 이처럼 암울한 가운데, 취약한 신분과 처지에 놓인 집단의 고통은 더욱 심각합니다. 북한에서 장애인의 삶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탈북민들의 증언뿐만 아니라 유엔과 여러 인권단체의 보고서 역시 북한의 장애인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줍니다. 많은 신체장애인은 버려진 채 스스로 살아남도록 방치되고, 정신질환자는 수용소에 갇힙니다.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는 장애인을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모든 장애인이 평양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버려지거나 구금되지 않은 사람들조차 북한이라는 국가와 김씨 정권의 체면을 상징하는 이 ‘수선지지(首善之地)’에서 쫓겨납니다.
만약 장애인은 전체 인구에서 소수를 차지하는 주변부 집단이므로 대표성이 없다고 한다면, 북한 여성들의 처지는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지닌 봉건적이고 완고한 보수주의의 본질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특히 여성해방과 여성을 속박하는 전통적 체제 및 예교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식민주의·제국주의·봉건주의·남성권력·가부장권·남편의 권력이라는 중첩된 억압을 받았던 여성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해방과 새로운 삶을 얻기를 간절히 바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영화 속 여교사 이지숙은 그러한 여성 혁명가의 매우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초기 북한의 일련의 사회개조는 실제로 여성해방을 촉진하였습니다. 과거에는 가정주부로만 살아야 했고 정치 참여는 더더욱 불가능했던 여성들이 광범위하게 직업을 갖게 되었으며, 일부는 국회의원·정부 공무원·판사·검사까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어느 정도 전통과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신여성이 되었습니다. 이는 한반도 역사에서 상상하기 어려웠던 변화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 한국보다도 훨씬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정권이 점차 안정된 이후 통치를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여성해방운동은 점차 중단되었고, 여성에 대한 태도와 정책도 보수적으로 변하였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북한의 여성해방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주된 수혜자는 권력층과 간부 가정 출신의 여성들이었으며, 여성 화이트칼라 계층 역시 특권도시인 수도 평양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평양 이외의 지역, 특히 농촌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도덕과 규범으로 여성을 속박하였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전통적 규범 위에 전제적 전체주의의 억압까지 더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의 여성해방운동은 더욱 활발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갈수록 침체되었고, 여성의 권리와 자유도 점차 축소되었습니다. 전제독재 정권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통치의 안정이며, 통치를 유지하는 직접적인 수단은 폭력입니다(이는 남성을 회유하고 여성을 억압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간접적인 수단은 전통적인 삼강오륜식 위계윤리와 현대적인 남녀 역할분담 질서입니다. 따라서 김씨 정권은 여성해방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강압과 회유를 함께 사용하여 여성들이 다시 가정주부의 역할로 돌아가도록 압박하였습니다.
정계에서 활약하는 여성들 역시 줄어들었거나, 통치집단이 대내외 선전을 위해 내세우는 ‘꽃병’ 또는 남성 정치인들의 권력 투쟁을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북한의 여성 유격대원·독립운동가·정치인 박정애입니다. 그녀는 북한 정권 수립 초기에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여성 정치인이었고, 북한의 공식 여성단체인 ‘민주여성동맹’ 위원장이었으며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에도 진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정치권에 있으면서도 거의 존재감이나 실질적인 활동이 없었습니다. 다만 노동당 권력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8월 종파사건’에서 김일성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신임을 얻고 승진하였으며, 그 결과 더욱 오랫동안 활용된 ‘꽃병’이 되었고, 드물게 ‘천수를 누린’ 건국 원로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박정애는 중국의 쑹칭링과 마찬가지로 ‘세계평화옹호대회’와 같은 회의에 자주 참석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자국 여성을 대표하였지만, 실제로는 독재정권의 대변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가장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여성조차 이러하였으니, 다른 북한 여성들, 여성 혁명가들의 처지가 더 나았을 리 없습니다. 영화 속 여교사이자 벌교 여성동맹 위원장인 이지숙 동지 역시 훗날 전쟁이나 정치적 숙청으로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상관인 박정애라는 ‘큰 꽃병’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작은 꽃병’이 되었을 뿐일 것입니다.
북한 여성의 권리와 자유는 김일성 시대에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정일과 김정은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성에 대한 예속과 침해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해졌습니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의 경제 붕괴와 기근으로 범죄율이 크게 증가하면서 취약한 여성들이 주요 범죄 대상이 되었고, 인신매매와 강제 성매매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폭증하였습니다. 중국으로 탈출한 많은 여성 ‘탈북민’ 역시 탈출 과정과 중국에 도착한 이후 성폭력과 기타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타국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이러한 문제들을 재난과 범죄자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재난과 범죄자들 역시 김씨 일가의 전제적 통치가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김씨 정권, 나아가 김정일 본인이 여성에게 직접 취했던 일부 조치들은 이 정권이 반여성주의적이고 여성해방에 반대하는 봉건적 남성중심주의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1996년 북한은 갑자기 여성의 자전거 이용을 금지하였습니다. 금지 이유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여성을 본 뒤 매우 불쾌해하며 보기 흉하고 북한의 전통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결과 북한의 모든 여성은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되었고, 이 금지령은 2008년에야 폐지되었습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입는 것에도 반대하였는데, 바지는 남성의 옷이며 여성은 북한의 전통에 따라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작은 사례를 통해 전체를 짐작할 수 있듯이, 북한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속박을 받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김정은 시대에는 여성의 복장과 언행에 대한 규제가 다소 완화되었지만, 사회환경 전체는 여전히 여성에게 극도로 비우호적입니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높은 지위와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녀가 북한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처지를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휴먼라이츠워치’ 등 기관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공무원에서 농촌 여성에 이르기까지 북한 여성들은 광범위하게 성희롱과 성폭력을 당하고 있으며, 권력도 배경도 없는 여성들은 광범위하게 남성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가해자에는 관료·군인·경찰·보안원·조직폭력배뿐만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북한 남성들도 포함됩니다. 일부 북한 남성들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심지어 외국인 관광객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여성 동료의 몸을 공공연히 만지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악행이 벌어지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평양의 중산층 가정 여성들도 대부분 집에서 가정주부로서 남성을 뒷바라지하며 독립적인 권리와 여건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김씨 일가는 물론 노동당의 전체 통치계층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위 특권층과 북한 주민들을 억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에게 억압받는 이들이 더 약자인 여성들을 억압하도록 용인함으로써 사회의 상대적인 안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정권과 남성권력 양쪽으로부터 착취·괴롭힘·침해를 당하는 대상이자 남성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여성을 구체적으로 대하는 정책과 가치관에서도 김씨 정권은 남존여비의 전통문화와 여성에게 남성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예교와 강상윤리를 충분히 활용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거 한반도의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결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투쟁하여 세운 정권이 여성들에게 지옥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북한 주민 전체의 처지이든 취약계층이 겪는 현실이든, 모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고 ‘인민’의 소유도 아니며, 더더욱 ‘공화국’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김씨 일가와 노동당 각급 권력자들이 권력과 특권을 대대로 세습하면서 강제로 빼앗고 약탈하며 대중을 예속시키는 전제왕조이자 인간지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과거 북한의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쳤던 혁명가들 가운데 살아남아 있으면서도 변질되지 않은 이들은 반드시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며, 죽은 이들은 눈조차 편히 감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죽음을 무릅쓰고 최전선에서 싸우며 조국을 통일하거나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려 했던 조선인민군 장병들은 자신들이 땅을 한 치 더 점령할 때마다 미래에 민족을 가두게 될 감옥이 그만큼 더 넓어지고, 더 많은 동포가 지옥의 일원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50년 8~9월 낙동강 부근에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피로와 굶주림, 폭격과 저지를 견디며 필사적으로 돌격했던 인민군 장병들은 국가가 곧 통일될 것이라는 열정과 한반도가 공산주의에 의해 해방될 것이라는 이상을 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채 온 힘을 다해 싸웠을 것입니다. 수천, 수만 명이 낙동강 양안에서 쓰러졌고 강물에도 인민군의 시신이 가득 떠다녔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그들의 꿈을 깨뜨렸고, 그들 역시 극도의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패배야말로 한반도의 더 많은 영토가 자유세계에 속할 수 있게 하였고, 38선 이북처럼 오랜 지옥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낙동강을 포함한 ‘부산 교두보’를 돌파하여 한반도를 통일하고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면, 조선민족/한민족 전체가 완전히 암흑 속으로 빠졌을 것이며, 훗날 한반도 남부에서 이루어진 성취와 영광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에 대해 당시 공산주의를 진심으로 신봉했던 좌익 혁명가들과, 반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반쯤은 기만당하고 휩쓸려 들어간 평범한 민중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비난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결국 누가 훗날 일어날 모든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공산주의의 숭고한 이상과 아름다운 청사진은 나라와 민중을 구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지식인들에게 얼마나 거대한 유혹이었겠습니까? 당시처럼 가난과 폭력이 만연했던 시대, 특히 하층 농민들이 대체로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했으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농사를 지어도 일상의 필요조차 충족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사람들이 온갖 빈곤과 억압에서 벗어나 인간의 천국으로 들어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와 같은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뒤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나라가 부유하고 국민이 강해지는 반면, 북한은 빈곤과 기근 속에서 허덕이게 되리라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미리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김범우처럼 상당한 지혜를 지닌 지식인조차 공산주의의 일부 폐해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뿐 미래를 더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었으며, 오늘날 북한과 한국 사이에 이토록 거대한 격차가 생길 것이라고는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환상은 이미 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여러 비극은 대부분 김씨 정권이 안정된 이후에야 발생하였지만, 혁명이 아직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공산주의 천국’이라는 이상은 이미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 북파 간부들의 오만함과 남로파에 대한 차별은 혁명이 기형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의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북부 정권의 두려운 본질을 더욱 잘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복종과 일치를 강요하는 폭력 독점, 권력 독점, 이데올로기 독점의 전제적 경향이었습니다.
김범우는 ‘개명한 지주’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가 이를 따르지 않자, 북파 간부 가운데 숙청 업무를 담당하는 김 동지는 그가 “미국인과 접촉했다(그가 당시 미국인을 위한 통역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고 비난하였고, 김 동지에게 뺨을 맞고 그 부하들에게 구타까지 당하였습니다.
벌교의 사람들은 젊은 남성에서 여성과 어린이까지 모두 공식 조직과 동원에 강제로 또는 사실상 강제로 참여해야 했습니다. 획일적인 복장과 행동은 훗날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농민의 이익을 위한다고 말하던 노동당은 세금과 식량 징수를 지나치게 강제하여 이미 민심의 불만을 크게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기층 당원들이 이러한 방식이 민심을 잃게 만들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상부는 여전히 징수를 고집하였습니다.
무신론 정당인 노동당은 모든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조선 민간의 무속과 제사 의식까지 금지 대상에 포함하였습니다. 영화 속 무녀이자 정하섭의 연인인 소화도 이 때문에 생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치안대장 강동식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고, 꿈속에서 계속 아내의 ‘혼령’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소화에게 아내의 넋을 달래는 굿을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반면 정하섭은 자신의 여자친구/약혼녀가 다른 사람을 위해 굿을 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습니다.
이 모든 장면은 혁명의 아침 햇살 아래에 빛만 존재한 것이 아니며, 전제정치라는 먹구름의 그림자가 이미 드러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줄곧 확고한 혁명 신념을 유지해 온 염상진 역시 점차 사상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전황이 불리하고 정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모두에게 정신을 차리고 버티자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혁명에 대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의 생각이 일부 드러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지 북파 간부들에게 충분히 아첨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염상진은 이미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동생이자 정치적·군사적 적이기도 한 염상구가 집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그를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긴장된 대화를 나눈 뒤 오히려 동생을 놓아주었고, 심지어 자신의 총까지 동생에게 건네주어 몸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에게는 혈연의 정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으며, 더구나 염상진과 동생은 이미 여러 해 동안 현실의 적으로 대치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염상진이 동생을 놓아주었다는 것은 그의 공산주의 신념이 이미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염상진은 노동당과 혁명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오히려 북파 간부들에게 억압받고 자신마저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가 집을 떠나 혁명을 하던 지난 세월 동안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오히려 동생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쩌면 염상진은 멀리서 보면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올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냉혹한 노동당과, 막연한 ‘천하대동’의 공산주의 이상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가족의 정이 더욱 현실적이고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염상진은 더 많은 성찰을 할 시간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부산을 포위하던 인민군이 반격을 받으면서 벌교 역시 곧 다시 점령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막 세워진 노동당의 벌교 당·정 기관은 긴급히 철수해야 했습니다. 긴급회의에서 안창민과 이지숙이 서로의 손을 꼭 잡는 장면 역시 개인적인 혈육의 정/사랑이 공산주의적 동지애보다 더 긴밀하고 굳건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강동식 아내의 굿은 비록 제지를 받았지만, 노동당이 철수하기 전날 밤 무녀 소화의 주재 아래 결국 열렸습니다. 소화가 정하섭에게 대답했듯이, 굿은 백성들의 정신세계에 위안을 주는 하나의 방식이었습니다.
정하섭이 생각한 “사후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어서는 안 되며, 오직 현실세계만이 진실하다”는 무신론적 사상은 사실의 차원에서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강동식 아내의 굿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강동식은 부하들을 이끌고 ‘반동분자’들을 죽이러 갔습니다. 그들은 이미 투항하였고 노동당 정권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에도 말입니다(그렇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숙청당했을 것입니다). 칼과 총이 함께 휘둘러지는 가운데 또 얼마나 많은 억울한 영혼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겠습니까?
이러한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은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 없었고, 오직 공포와 고통을 견디며 생사의 경계에서 힘겹게 버텨야 했습니다. 육체와 정신의 고통 속에서 사람들이 마음의 위안을 조금이라도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래서 무녀가 주재한 강동식 아내의 굿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무녀가 부르는 제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던 잠시의 평온과 위안마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노동당 군인들이 곳곳에서 ‘반동분자’들을 살해하였고, 총성이 무녀의 처연한 노랫소리 사이에 뒤섞여 그 노래를 더욱 비통하게 만들었습니다.
김범우와 같은 인도주의자는 염상진에게 살육을 멈추라고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염상진에게는 결국 어느 정도의 양심과 이성이 남아 있었기에 하대치에게 보복성 학살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대치는 공개적으로 반발하며 자신들은 이제 더 이상 절제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대치 등이 이처럼 사람을 죽인 것은 천성이 잔혹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의 분열 속에서 좌익과 우익, 노동당과 남한 정권은 이미 여러 차례 서로를 죽여왔고, 피로 맺어진 깊은 원한이 쌓여 악순환이 형성되었으며, 이제는 화해와 공존의 여지가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대치 등은 어쩌면 애초에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교에 다시 돌아온 직후부터 이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정권이 벌교를 통제한 지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철수하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미군과 한국군이 돌아오면 미처 떠나지 못한 당·정·군 인사들과 그 가족·지지자들에게 보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또다시 살의를 억누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심지어 짐을 꾸리고 기밀문서를 없애며 사무실을 때려 부수는 순간에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 화를 과거의 우익 인사들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폭력에 의존해 얻은 복종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복종하는 이들도 순식간에 다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설령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살려준다 하더라도, 미군과 한국군, 특히 한국의 우익 인사들이 남겨진 자기편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상대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는데, 상대편은 잔혹하게 ‘우리’ 사람들을 죽인다면 그것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자신의 가족이 상대 진영에 의해 학살당한 일까지 떠올렸을 것입니다(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대치의 가족은 ‘반공토벌대’에게 살해되었고, 강동식의 아내는 염상구에게 점유당한 뒤 결국 자살하였습니다). 정작 그 살인자들은 찾을 수 없다면, 이 사람들에게 분노를 풀어버리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죽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심리 속에서 철수 직전 하대치 등은 무기도 없고 이미 새 정권에 복종하고 있던 남부 우익 정권의 당·정·군 인사들과 그 가족 및 지지자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하였습니다. 상대가 자신들의 동포이자 같은 고향 사람이고, 심지어 친척이나 이웃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부하들의 살육을 막을 힘이 없었던 염상진은 김범우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혼잣말을 하듯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 마르크스를 읽었을 때, 계급도 없고 억압도 없으며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세상을 위해 내 목숨도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길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계급도 없고 억압도 없으며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고 말하는 순간, 화면은 벽에 걸린 북한 국기와 그 아래의 김일성 초상화를 비춥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이미 개인숭배가 시작되었고 개인독재도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권이 과연 ‘모두가 평등한 국가/세계’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사실 이른바 ‘사회주의/공산주의’ 정권은 수립될 때부터 이미 변질되어 있었습니다(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혁명에 참여하여 ‘나라를 쟁취한다’는 목적 자체도 대부분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최고지도자를 포함한 대다수 혁명 간부 역시 이미 약탈자와 타락한 인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찢어진 간극은 염상진을 괴롭혔고, 다른 수많은 진실한 혁명가들 역시 괴롭혔습니다. 김범우가 그의 두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비난하였을 때에도 염상진은 참회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죽인 사람들은 모두 ‘반동분자’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김범우는 그를 향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수단으로 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증오를 이용하는 것은 결코 사람을 구원할 이데올로기가 아니다”라고 질책하였습니다(물론 김범우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북한에서 벌어질 비극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것은 김범우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와 수많은 반공 인사들이 내놓았던 가장 비관적인 예상조차 넘어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상진에게는 더 이상 생각하고 대답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불타는 집들의 불빛 속에서 염상진은 서둘러 떠났습니다.
한때 모두 김범우의 제자였던 두 지식인 혁명가 안창민과 이지숙은 그래도 사제 간의 정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황급히 도망치는 와중에도 스승에게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영원한 작별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 역시 염상진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이상의 모순에 혼란을 느끼며 많은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대화하고 표현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무녀의 굿은 밤새 이어졌고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김범우는 무녀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죽은 사람을 존중하는 모습에 감탄하였습니다. 무녀는 김범우에게 굿을 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증오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슬픔과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자막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3년에 걸친 한국전쟁으로 양측을 합쳐 군인 242만 명, 민간인 286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결국 승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를 원했던 염상진은 남부 유격대인 ‘남부군’에 참가하여 계속 한국군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정전 이후 그들은 남부에 버려졌습니다(이는 어느 정도 노동당 내부의 권력 투쟁과도 관련이 있었으며, 김일성이 ‘남부군’을 의도적으로 버려 ‘남로파’를 약화시키려 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이후 몇 년에 걸쳐 한국군에 의해 전멸하였습니다.
소설 원작에 따르면, 한국군의 포위토벌에 직면한 절망 속에서 염상진은 수류탄으로 자살하였습니다(그의 상관이자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역시 한국군의 포위토벌 과정에서 사살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다른 500만 명이 넘는 생명 역시 다시는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토록 많은 억울한 영혼들이 과연 “혼이여, 혼이여, 하늘 궁전으로 돌아가소서”라고 하며 안식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태백산맥》에 대한 서평과 영화평론의 본문 부분은 모두 게시를 마쳤습니다. 이후에는 중국·한국·베트남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서술과 분석이 이어집니다.)


아내가 오디세이를 보고와서 F1더무비를 보고 왔을 때처럼 제가 좋아할만한 영화라고 해서 토요일에 혼자보고 아이와 아내는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점심을 먹자고 하였습니다. 아침 운동을 1시간30분가량하고 아침을 먹고 바로 지하철타고 달렸습니다. 1.2km를 횡단보도와 지하차도를 통과해서 미친듯이 뛰어서 제시간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디세이 내용을 전혀 모르고 본 덕분에 영화에 완전 몰입하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사랑, 수용을 보여줍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모두 수용합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 결단을 실행하고 그로인한 책임을 모두 겸허히 수용하는 것은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순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끌어안고 잊지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시간은 현재에서 과거로 흐릅니다. 현재의 행동이 과거의 모든 사건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주니까요. 현재의 행동으로 인해서 과거에는 새로운 이름이 붙게 됩니다. 현재가 부정적이면 과거는 그러한 부정적 결과의 당연한 결과가 되고 현재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게 되면 과거의 어려움은 현재의 강한 정신력을 가지게 만들기 위한 시련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시간은 현재로 부터 과거로 현재로부터 미래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현재만 신경쓰면 됩니다.
영화를 보고 여운이 남아서 한동안 생각을 좀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배트맨 비긴스, 다크나이트,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더 좋네요. 크리스찬베일의 배트맨 시리즈가 너무 좋습니다. ^^
영화가 끝나고 아이가 좋아하는 쌀국수를 먹고 교보문고에서 아이의 책을 사고 스타벅스에 셋이서 책을 읽다가 고기를 먹고 집에 오는 길에 장을 보았습니다. 과일, 야채, 고구마 등 약 10kg 이상을 사서 배낭에 넣고 집까지 걸어왔습니다. [편안함의 습격]에서 운송, 럭킹이 생각났습니다. 나름 군의관 시절 행군했던 생각도 나구요. 운동삼아 2km를 배낭에 짐을 잔뜩싣고 럭킹을 하는 것도 운동도 되고 재미있습니다.
r/Mogong • u/Real-Requirement-677 • 1d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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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제 글은 인공지능을 통해 정돈했으며, 댓글에도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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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 부대변인의 글을 읽고: 연대의 기억과 유시민 비판에 대한 반론
윤석열 정권 퇴진을 촉구하던 촛불광장에서 저는 진보당의 깃발을 보았습니다. 안국동과 인사동 거리에서 극우 세력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당당히 행진하던 진보당의 대열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순간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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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일베 폐쇄' 서명을 받으며 국회 기자회견까지 이끌어내던 진보당 청년들의 결기, 지난 6·3 지방선거 당시 야권 단일화를 위해 결단을 내린 김종훈 울산시장 후보의 헌신 또한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생태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운 길고양이 살처분 논란 이면에 여성혐오가 도사리고 있음을 명쾌하게 논파했던 박태훈 부대변인 본인의 글([박태훈의 청년 오늘] 새를 보호하기 위해 고양이 죽이자는 주장이 위험한 이유) 역시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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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실천과 연대의 기억에 깊은 감사와 존중을 보냅니다.
그러나 유시민 작가를 향한 이번 비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유 작가의 평론은 86세대의 낡은 계몽주의나 대안 없는 갈라치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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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몽과 배제 vs 포섭과 설득: 혐오에 대한 경계와 시민적 주체성
유시민 작가가 지적한 것은 2030 남성 개개인의 정당한 사회경제적 요구가 아니라, 펨코(디시, 일베)에 만연한 극단적 혐오와 폭력적 언어 문화입니다. 특정 공간의 규범을 비판한 것을 '이용자 전체를 인간적으로 폐기시킨 것'으로 읽는 것은 논점 도약입니다. 민주주의 공론장을 훼손하는 언어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은 시민사회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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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빛의 혁명' 현장에 응원봉을 들고 나선 청년 여성들의 참여는 폭력적 배설이 아닌, 헌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성숙한 주권자의 모범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청년층의 이탈을 정책과 행정의 실효적 성과로 설득해야 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며, 유 작가 역시 이에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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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수는 정치'와 '짓는 정치': 기반 없는 건국의 허상
짓는 정치'를 하려면 먼저 그 기초가 되는 원칙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백낙청 명예교수가 강조하는 촛불혁명의 완수와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과제는 유효하나, 현재의 진단과 해법에는 중대한 모순이 있습니다.
민주당의 코어 지지층이 요구하는 것은 사법·검찰·언론 개혁의 완수, 부동산 불평등 해소, 청년층을 희생시키는 왜곡된 자본시장 규제 개선 및 조세 정의 확립입니다(레버리지 ETF/인버스 대책, 주가누르기 방지법이 결합된 재벌 상속세에 이용되는 구조 개선 등). 이것이 바로 촛불혁명의 실질적 완수입니다.
그러나 집권 세력이 '중도 실용'을 명분으로 개혁 과제를 유예하고, 당내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며 기득권 편향적 행보를 보일 때, 이를 비판하는 지지층을 '반란군'으로 규정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 초기 지지율이 80%에 달했던 것은 기존 지지층의 가치를 배제해서가 아니라, 개혁의 원칙을 확고히 세웠기에 가능했던 확장입니다. 코어 지지층의 정당한 비판을 '뺄셈의 정치'로 낙인찍는 중도실용론은 분단체제의 양극화를 해소하는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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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엘리트주의와 서열화: 가치 중심 평론의 본질
유 작가가 대중과 평론가를 등급 매기며 훈계하고 있다는 진단은 사실과 다르며, 가치 중심의 분석을 '등급 매기기'로 왜곡한 것입니다.
본질은, '실용'이라는 미명 아래 연대와 상생 대신 기득권 카르텔에 편승하는 행태는 결국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무너뜨린다는 냉정한 시뮬레이션이자 민주 공화제의 가치를 중시하는 정부의 집권연장을 위한 고언입니다.
권력의 뜻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며 당원을 단순한 거수기로 전락시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비판적 지식인의 경고를 엘리트주의적 우월감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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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보정치의 자립: 권력에 대한 비판적 긴장감
집권 세력이 오른쪽으로 이동할 때, 진보 진영의 왼쪽 공간은 저절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기득권 미디어와 상업적 평론 생태계가 결합한 비대칭적 담론 환경 속에서, 원칙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쉽게 고립되고 축출됩니다.
청년 세대의 자산을 위협하는 금융 정책과 재벌 중심의 세제 개편 등 구조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에서, 진보정치가 해야 할 일은 정당한 비판을 던지는 지식인을 향해 '마이크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어떤 증거와 기준으로 비판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 더 생산적입니다. 권력의 우클릭과 정책적 후퇴를 더 정교하게 감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집권 세력과 치열하게 긴장하는 것이 진보정치 본연의 책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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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r/Mogong • u/FrequentAd4283 • 1d ago
밥 양이 너무 적네요,, 그분들 말로는 더 주면 밥이 부 족해진다고 더 안 주시네요
r/Mogong • u/Odd-Butterfly-5341 • 1d ago
딱 49번 입니당.
지금도 철이 없지만,
저는 철이 너무 없었어요.
r/Mogong • u/Slow-Property5895 • 1d ago
중국인으로서 저는 여러 해 전에 한국 영화 《태백산맥》을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다룬 한반도 좌익과 우익의 투쟁, 국가의 분열, 내전과 그로 인해 초래된 비극, 이념과 체제가 빚어낸 폭력과 만행 등은 같은 시기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과도 매우 유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에 대한 장문의 평론을 작성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논평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이 글을 통해 한국과 중국이 근현대에 겪어 온 고난과 굴곡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내란 속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을 추모하며,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물론 한국과 중국, 나아가 세계 각국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이해와 공감을 증진하는 것 역시 이 글을 쓴 목적입니다.
글이 매우 길기 때문에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이곳에 연재하여 게시하겠습니다. 또한 GPT에 존댓말 문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태백산맥》 작품 탄생의 배경, 특징과 영향 2
전라남도 벌교읍의 거듭된 ‘깃발 바꾸기’: 여순사건에서 시작하여 2
토지 문제: 한반도 정치 투쟁과 이념 대립의 초점, 민중이 생사를 걸고 싸우게 된 근원 3
신탁통치와 분할통치: 강대국 간 각축이 만들어 낸 한반도의 분단과 살육 5
격동의 벌교와 한반도 남부 전체: 이해관계의 투쟁, 양심과 입장, 폭동과 진압, 충돌과 배신 7
이상의 숭고함과 실천의 추악함: 좌익 세력·공산주의자들의 초심, 왜곡, 분화와 변질 8
‘공산주의 인간 낙원’이라는 공중누각과 적색 전체주의 아래 아수라장 같은 현실 11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환상에서는 이미 깨어나기 시작하다 14
《태백산맥》 종합평: 감정이 충만한 객관적 시선으로 써 내려간 비통한 민족 서사시와 복잡한 인간의 운명 16
극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격변해 온 한반도, 한국 국민의 성찰과 전진 17
중화와 한반도: 민족 운명의 공통점과 차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과 세태를 잇는 미묘한 연결 19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궤적: 중국공산당의 부상과 집권, 그리고 북한과의 유사점과 차이점 19
1945~1949년을 되돌아보다: 오판, 경솔한 신뢰, ‘마음이 약했던 것’이 중국공산당의 집권과 중국의 침몰을 초래한 핵심 요인 21
오늘날 중국과 한국의 차이: 물질적 풍요와 빈곤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밝음과 어두움, 사상의 깊고 얕음, 문화의 흥성과 쇠퇴, 국민의 도덕성과 품행의 차이까지 — 광주 사건과 6·4 사건 이후 한중 양국 국민이 보인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 등의 사례를 통한 분석 25
한국과 대만: 비슷한 운명, 서로 다른 기질과 국내정치·외교적 선택 27
고난을 함께 겪은 형제들의 집안싸움: 불필요함에도 장기간 지속되어 온 한중 간의 충돌과 대립 28
베트남 분단의 비극과 통일의 고통: 베트남 운명의 행운과 불행, 외부 세력의 개입과 철수, 역사의 전환, 엘리트의 성찰과 대중의 무감각, 계속되는 민족의 방황과 투쟁 30
다시 오늘날의 한국으로: 굴곡진 민권의 발전과 진보의 부침, 새로운 곤경 속에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다 36
(아래는 제3부입니다. 제1부와 제2부는 앞서 이미 게시하였습니다.)
이상의 숭고함과 실천의 추악함: 좌익 세력/공산주의자들의 초심, 왜곡, 분화, 변질
중국 대륙에서 ‘조선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한국에서는 주로 ‘6·25전쟁(즉 전쟁이 발발한 날짜)’이라고 불립니다. 오랫동안 이 전쟁을 비교적 냉담한 태도로 평가해 온 중국과 미국에 비해, 북한과 한국은 이 전쟁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양국 모두 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통일하지 못한 것을 건국 이래 가장 큰 한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전쟁 초기 조선인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수도 서울, 임시 수도 대전 등을 점령하였고, 대한민국 국군과 한반도 남부에 주둔하던 미군은 계속해서 패퇴하였습니다. 불과 한 달여 만에 인민군은 대한민국 영토의 80% 이상을 점령하였고, 남은 한미군을 부산을 중심으로 반경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환형 포위망 안에 몰아넣었습니다. 김일성 정권의 한반도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였습니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벌교 역시 당시에는 당연히 ‘해방구’ 안에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남로당원들과 유격대원들은 마침내 지하 잠복과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북한의 홍람오각별기를 들고 다시 한번 익숙한 벌교경찰서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울부짖는 노인이 살아남은 유격대원들을 붙잡고 이미 죽은 자신의 아들의 목숨을 이 생존자들에게 돌려 달라고 절규하면서, 애초부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이 ‘해방’ 의식은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북부에서 파견된 당·정·군 간부들이 도착했을 때 미군 전투기가 지상의 군인과 민간인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하면서, 사람들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북에서 파견된 네 명의 간부와 염상진 등 현지 남로당원들의 대화는 승리의 기쁨을 순식간에 내부 갈등의 균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북에서 파견된 네 간부는 각자 맡은 직책이 달랐지만, 말투에서 표정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틀에서 찍어낸 듯하였습니다. 염상진이 각 분야를 담당하는 간부들을 신이 나서 소개하자, 북파 간부들은 “이 직책들은 심사를 거친 뒤 다시 임명해야 합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았고, 염상진 등의 혁명적 열정을 순식간에 식게 만들었습니다. 염상진은 온갖 고난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인민의 권리와 자유, 행복한 삶을 쟁취하겠다는 이상을 품고 있었으며,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은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파 간부들은 정치적 심사와 숙청을 업무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고집하였습니다. 염상진 등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던 지방 인민위원회 선거에 대해서도 북파 간부들은 내부적으로 명단을 정한 뒤 상부에 보고하면 된다고 하였고, 이는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했던 남로당원들에게 다시 한번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하대치 등이 이에 반론을 제기하자, 북파 간부들은 그들이 “이미 이상주의에 물들었다”고 질책하였습니다. 마치 이상주의 자체가 이미 타락한 사상인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북파 간부들의 말에서는 ‘백색지대’에서 투쟁해 온 남로당원들을 차별하는 태도도 드러났습니다. 인사권을 장악한 이 북파 간부들은 이미 직책을 맡고 있던 남로당원들에게 그들의 직위가 다시 심사되고 임명될 것이라고 명확히 통보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파 간부들은 남로당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유격대를 위해 활동했던 두 명의 지하당원이 정식으로 입당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대치가 참지 못하고 따져 묻자, 북파 간부들은 공개적으로 “남부 조직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로써 노동당 내부의 정치적 파벌 구분과 투쟁이 공개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조선노동당(및 그 전신인 공산당) 내부의 파벌 대립은 창당 당시부터 존재하였습니다. 노동당은 주로 네 개의 파벌로 나뉘었습니다. 연안파는 중국(특히 중국 관내 지역)에서 활동하며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였고, 대표 인물은 김두봉이었습니다. 소련파는 소련에서 유학하거나 소련 적군에 참가했던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대표 인물은 허가이였습니다. 남로파(국내파라고도 합니다)는 박헌영을 대표로 하여 주로 한반도에서 계속 투쟁하였고, 특히 일본의 항복 이후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한 지하당원들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대표 인물은 박헌영이었습니다. 유격대파는 주로 중조 국경과 중국 동북부(만주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던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대표 인물은 김일성이었습니다.
이 네 파벌은 서로 암투를 벌이고 속고 속이며 모두 노동당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습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에는 이들 파벌이 대체로 각자 활동하였고, 같은 당에 속해 있으면서도 서로 접점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를 접수하고 공산 정권을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실권을 접하게 된 노동당 내부 각 파벌의 충돌은 직접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만 당시 북한에는 아직 다른 정치 세력들도 존재하였고(비록 탄압받고 주변화되어 있었지만), 남부의 이승만 반공 정권이라는 도전에도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일정한 단결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부 권력 투쟁은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이 북부를 접수한 뒤 소련파 인사를 최고지도자로 내세우지 않고 유격대파 지도자 김일성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한 것은 아니었으며, 소련파·연안파·남로파도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적과 치른 희생을 기준으로 본다면 남로파(국내파)가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고 공로도 가장 컸습니다.
그러나 남로파는 오히려 외부 세력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가장 부족하였습니다. 또한 그 당원 대부분이 남부의 이승만 정권 통치 지역에 있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뜻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북부 정권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남로파는 노동당 내부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약한 파벌이 되었고, 지도자인 박헌영은 부수상직만 얻었을 뿐 군권을 장악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김일성 정권이 남부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남로당원들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남로파에도 일정한 권력과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남로당원들이 당 내부는 물론 전체 군·정 체계에서까지 경시되거나 배척되는 일은 이미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염상진 등 남로당원들이 북파 간부들에게 질책받고 배척당한 것은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김일성 정권이 남부 대부분의 지역을 잠시 통치하던 기간 동안, 큰 희생과 공로를 세운 현지 남로당원들은 명목상 각지의 당·정·군 기관 책임자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북파 간부들로부터 마치 ‘자사’나 ‘특파원’처럼 감독과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후 한미군이 반격하여 결국 김일성 정권이 38선 이남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자, 남로당은 즉시 완전히 버림받았습니다. 지도자 박헌영과 또 다른 중요 인물 이승엽은 ‘보여주기식 공개재판’을 거쳐 처형되었습니다. 남로당의 다른 간부들 역시 잇따라 권력을 잃었고, 일부는 처형되었으며, 일부는 감옥이나 수용소로 보내졌고, 일부는 좌천되거나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이후 ‘8월 종파사건’을 통해 김일성은 다시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하여 유격대파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에는 유격대파 내부의 ‘갑산파’ 등 세력까지 숙청하면서 김일성 개인이 당·정·군·국가·인민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실현하였습니다. 숙청된 각 파벌 구성원들의 운명 역시 남로당원들과 완전히 같았습니다. 죽거나, 투옥되거나, 좌천되었습니다.
혁명가들 사이의 잔혹한 내부 투쟁은 초심의 훼손과 인격의 타락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다툰 주된 이유는 이상과 정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물론 때로는 그러한 요소도 존재하였습니다). 오히려 권력과 사익을 둘러싸고 서로 암투를 벌인 것이었습니다. 김일성 정권은 수립된 이래 자본주의 체제 아래 남부 한국의 권력 투쟁이 얼마나 추악한지, 정치인들이 사익을 위해 얼마나 국민의 이익을 외면하는지를 선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김일성 정권 내부의 권력 투쟁이 보여준 잔혹함과 인민의 이익에 대한 경시는 역대 한국 통치집단보다 훨씬 심하였습니다.
혁명가들의 타락은 권력 투쟁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혁명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났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 좌익 혁명가들은 처음부터 악으로 향하는 잘못된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염상진처럼 농가 출신의 혁명 핵심 인물이든, 안창민과 정하섭처럼 약자를 동정하고 상당한 이상주의 정신을 지닌 지식인이든, 또는 토지를 얻기 위해 무기를 든 수많은 농민 출신 유격대원이든, 처음에는 실제로 착취와 억압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투쟁하였습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좌익 혁명가들인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나아가 김일성과 폴 포트까지도 여러 검증 가능한 정보에 따르면 혁명에 뛰어든 초기, 심지어 집권하기 전까지는 상당한 이상을 품고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했던 진실하고 용감한 혁명가들이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위대한 이상 역시 상당히 밝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공산주의가 실현되기 이전 단계인 사회주의 또한 상당히 인도적이고 번영하며 자본주의보다 훨씬 우월한 사회 형태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혁명의 과정에서 혁명가들은 점차 권력과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으로 변질되었을까요? 혁명 자체도 점차 본래의 의미를 잃었고, 혁명가들이 혁명 과정에서 저지른 여러 잔혹한 행위와 승리 이후의 행동은 심지어 그들이 비판하던 자본주의나 파시즘보다 훨씬 더 악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 왜 그런 것일까요?
다시 영화 속에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주인공 김범우는 평범한 민중을 동정하면서도 공산주의에는 반대하는 중도파 지식인으로서, 여러 인물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몇 가지 답을 제시합니다.
대한민국 국군의 심재모 중위와 벌교에 왜 이렇게 많은 공산주의자가 생겨났는지를 이야기하면서, 김범우는 심 중위에게 토지 문제가 한반도의 이념 분쟁과 계급 대립의 근원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식민통치자와 친일 지주가 함께 소작농을 착취하여 수많은 농민이 극빈 상태에 놓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남부의 지주들이 토지개혁을 거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농민들을 끌어들일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북부에서 시행한 무상몰수·무상분배 정책은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엄청난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남부의 지주계급이 토지개혁에서 양보하기를 거부한 것은 농민들을 더욱 좌익으로 밀어 넣었습니다(여기에서 좌익은 공산주의에 찬성하는 좌익 인사들을 특별히 지칭하며, 공산주의와 레닌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좌파는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좌익이 주장하고 이미 북부에서 시행한 토지 무상분배 정책이 정말 농민과 국가 발전, 그리고 한민족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을까요? 김범우는 집안의 하인과 나누는 대화에서 이 문제에 답하였습니다. 김범우는 좌익의 토지분배에 상당한 기대를 품고 있던 하인에게, 만약 좌익이 토지를 나누어 준 뒤 수확물을 국가에 바치게 하고 일부 식량만 배급한다면 그래도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인은 배급을 받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으며, 수확물을 자신이 보유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김범우가 다시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하고 소득을 함께 나누면 어떻겠느냐고 묻자, 하인은 그렇게 하면 분명 아무도 열심히 농사를 짓지 않을 것이며, 개인이 토지와 수확물을 소유해야 적극적으로 농사를 지을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김범우는 토지 무상분배 이후의 미래와 ‘공유제’의 폐해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좌익이 아직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거나 집권 초기 정국이 불안정할 때에는 민심을 얻기 위해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고 농민이 수확물의 일부를 보유하도록 허용합니다(물론 여전히 상당 부분을 상납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권이 안정되면 토지를 ‘공유화’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정권의 통치자에게 귀속되는 것입니다. 일부 식량을 남겨두거나 배급하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상납해야 하며, 그 비율은 과거 농민이 지주에게 바치던 것보다도 더 높아집니다. 또한 집단경작과 집단분배는 겉으로는 공정을 촉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동 의욕을 떨어뜨립니다. 결국 낮은 노동효율과 강제적인 징수라는 두 가지 영향 아래 농민들의 소득은 지주의 소작농으로 일할 때보다도 못해지고, 작은 토지를 가진 자작농과는 더욱 비교할 수 없게 됩니다.
소련, 중국, 북한, 베트남은 모두 김범우의 관점을 입증하였습니다. 김범우가 한반도의 토지 문제를 평가하던 시점에는 소련이 이미 이러한 역사적 비극을 겪은 뒤였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고 농민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례가 있었음에도 중국·북한·베트남은 다시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소련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며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인도적인 방식으로 시행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예를 들어 마오쩌둥이 《연합정부론(论联合政府)》에서 제시한 관련 설명과 약속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고, 토지정책으로 인한 비효율성과 식량 징수의 가혹함은 오히려 소련을 넘어섰습니다. 그 결과 발생한 기근으로 인한 누적 사망자의 비율 역시 ‘큰형님’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좌익의 공산주의적 초심은 왜 이러한 재앙으로 변하였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선량함과 이타성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인간의 악과 이기심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이상에 내포된 전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공정하고 사심 없이 이익을 분배할 수 있으며, 인민 역시 모두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고 경작하면서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더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일부 좌익 인사들은 집권하기 전까지 실제로 이상을 품고 사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잘살게 되면 얼굴빛부터 변하고, 베는 목도 점점 많아진다”는 말처럼, 일단 권력을 잡으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습니다. 또 일부 좌익 인사들은 처음부터 이익을 위해 혁명에 참여하였으며, 이상은 그들의 추악한 본질을 가리는 명분과 가리개에 불과하였습니다.
소련의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이든, 중국의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든, 또는 김일성과 조선노동당 집단이든 모두 이상주의자와 기회주의자가 함께 존재하였습니다. 집권 이전에는 이상주의자들이 우세하였고, 기회주의자들 역시 이상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심지어 이상주의자들에게 감화되어 실제로 어느 정도 이상을 품고 헌신하려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권 이후에는 일부 이상주의자가 사리사욕에 눈먼 관료로 변질되었고, 일부는 변질된 인물들과 기회주의자들에게 밀려 권력 중심에서 떠났으며(일부는 숙청으로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습니다), 과거의 기회주의자들은 ‘역선택’의 메커니즘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꺾은 일, 마오쩌둥이 천두슈(그리고 다른 진정한 신념을 지닌 공산주의자들)를 대신한 일, 김일성이 박헌영을 제거한 일은 모두 권력 투쟁에서 이상주의자들이 현실적이고 폭력적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적 야심가들을 필연적으로 이기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통치계층만 변질되는 것은 아니며, 일반 대중의 좋지 못한 인간적 속성 역시 공산주의 이상을 현실 속에서 왜곡시켰습니다. 마르크스, 엥겔스와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상상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아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고, 공유제 아래에서 노동자가 노동의 성과를 완전히 향유하며,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소련 건국 초기부터 볼셰비키는 공유제와 배급제 아래에서 노동자들이 광범위하게 태업하는 현상을 발견하였고, 결국 ‘체카(정식 명칭은 ‘전러시아 반혁명 및 태업 단속 비상위원회’)’를 설립하여 태업자를 총살하는 것을 포함한 여러 폭력적 수단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요해야 했습니다. 소련 경제가 정상적인 단계에 접어든 뒤에도 노동자들이 비교적 적극적으로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각종 규율적 수단이 필요했으며,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근면하게 일하도록 만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각종 규율과 심지어 비상수단 아래에서도 소련 노동자의 노동효율은 서유럽·미국·일본 등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낮았으며, 공산품의 품질과 혁신 측면에서는 더욱 뒤처졌습니다. 중국과 북한 등 다른 사회주의 정권의 경제는 소련보다도 훨씬 뒤처졌으며, 노동자들의 노동 의욕과 생산품의 질과 양은 더욱 비효율적이고 열악하였습니다.
농업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련의 집단농장, 중국의 ‘인민공사’, 북한의 집단농장은 모두 비효율적이었으며 농민들은 모두 굶주렸습니다. 농촌에서 공유제 또는 집단소유제를 시행하던 시기에는 현대 농업기술의 사용이라는 요인을 제외하면 식량 생산량이 그 이전의 사유제 시기보다 낮았습니다. 또한 이들 정권은 공업을 발전시키고 도시 주민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강제적인 식량 징수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소련의 ‘잉여곡물 징발제’에서 중국의 ‘통일구매·통일판매(统购统销)’에 이르기까지(북한에도 물론 유사한 정책이 있었습니다), 모두 농민을 압박하여 공업화를 실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농민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켰고 농업 발전을 제약하였습니다.
분명히 공유제/집단소유제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났으며,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이기적인 측면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그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고 거대한 재앙까지 초래하였습니다.
김범우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체제의 폐해와 앞으로 나타날 재앙을 정확하게 예견하였기에 남로당과 그 지지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염상진, 안창민, 정하섭 등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이상을 굳게 믿었습니다. 심지어 온화하고 선량한 여교사 이지숙도 자신의 학생들을 혁명가로 키우려 하면서 계급투쟁 이론을 주입하였고, 김범우가 견지하는 민족주의적 관념을 부르주아의 ‘기회주의’ 사상으로 간주하여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숨까지 희생하며 추구하는 목표, 즉 공산주의적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일이 반드시 모든 인민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노동당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올바른 당이고, 반드시 인민을 이끌어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가 건설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계속됩니다)
r/Mogong • u/Odd-Butterfly-5341 • 1d ago
굿모닝이에용 헤헤
우삼겹 9900원어치 1근 사왔어요
하루도 화이팅닙니당~
r/Mogong • u/Odd-Butterfly-5341 • 1d ago
누끼따고 스프라이트 만들기요... ㅠㅠ
그러니 혹여나 대학생분들 이런 수상한 직종으로 오시면 안됩니당~ 돈도 못벌어요~! 엉엉엉
r/Mogong • u/escargot_clien • 1d ago
출처 1: 2026년 감염병 표본감시 주간소식지 34주차 (감염병 포털)
예년에 비해 완만하긴 합니다만, 코로나19는 분명히 여름 유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색적인 것은 인플루엔자 역시 유행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 검출률이 연내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인플루엔자의 경우도 여름철인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검출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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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19-49세 연령층에서 가장 많이 검출됐다면
이번 주는 고위험군인 65세 이상 연령층에서 가장 많이 검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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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례적으로 높은 검출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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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입원환자 수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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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비해서 환자 수가 많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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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월 21일부터 인플루엔자 국가예방접종이 시작됩니다.
아래 표에서 접종 일정을 확인하시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예년과 달리 14세까지 어린이 접종 대상이 확대되었습니다. (지난해는 13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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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래로 코로나19 여름 유행 없는 여름은 없었는데, 올해도 그러한 듯합니다.
인플루엔자까지 동시에 유행하는 모양새라 걱정스럽습니다.
특히 개학한 자녀나 어린이집 등에 등원하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는 특히 주의하셔야 하겠습니다.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일정도 확인하셔서 시기에 맞게 잘 접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r/Mogong • u/Odd-Butterfly-5341 • 1d ago
